주의;
「1998년 시라즈미」 항목에 학교 폭력 소재 있음
미술관은 별로 좋아하지 않네~. 서툴다고 할까, 적응이 안 된다고 할까…. 조사 때문이 아니라면 안 와요, 이런 곳. 꼭 다른 사람이 필요하니까 번거롭기도 하고.
왜냐고? 응~, 그렇네에. 미술관이 뭐 하러 오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컨텐츠가 있나?
…작품을 보기 위한 장소. 흠, 근본적이네. 좋아. 그렇지, 뭐어. 감상하기 위한 곳.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그렸는가. 그로 인해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뭐랄까, 감상이라는 거에 있어서 사람이란 건 필수적인 요소죠.
물건만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잘 없지 않나요. 사람들이 쉽게 흥미를 가지는 전시라면 대개 그렇죠. 풍경화라도 대개는 인물이 그려져 있고, 뭐랄까, 조각? 그것도 큰 차이 없으려나. 때때로 조각상 중에는 토르소처럼 얼굴이 아닌 몸만을 만들어낸 것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철저할 정도로 대상화된 물건이라서. 사람으로 볼 수는 없거든요. 물건이야, 그냥. 감상의 대부분은 '잘 만들었다' 고. 그런 거에 몰입하지는 않으니까.
몰입, 그래요, 어렵죠? 얼굴이 없는 걸 짐작하려고 애쓰는 것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는 것도. 옛날에 목을 자르는 게 가장 처참한 처형으로 알려진 건 얼굴을 없애기 때문이에요. 사람 취급을 안 하겠다는 의사 표명이라고 할까. 동남아시아에서 수백년간 전쟁이 이루어졌을 때 불상의 목들이 잘려나간 거 알아요? 그냥 다 무너뜨리면 될 텐데 굳이. 뭐 그 때는 머리 자체에도 의미가 있었겠지만.
하여간, 알겠어요? 얼굴. 그게 사람이라고 하는 두루뭉술한 개념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지하고 관심을 가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소거든요.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모방을 할 수 있는 동물이란 말이지. 그게 곧 사회성이지 않나.
인간은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제각각 다른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데 어째서 대중적인 감상이나 공통 의견이 성립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옆에 있는 사람의 표정, 몸짓이나 흘리는 말…. 그걸로 무의식적인 합의나 학습을 하는 거에요.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눈치라고 하면 알기 쉬우려나. 사회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겠죠. 순간의 다수결.
작품을 볼 때도 말야. 여럿이 몰려오면 대부분은 같은 반응을 하거든요. 아아 멋지다, 그러게, 감탄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근데 혼자 오면 또 반응이 달라. 적어도 멋지다고 생각한 포인트가 완전히 바뀌거나, 예전엔 관심도 주지 않았던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러있거나 하기도 하고. 그건 남이 없어서거든요. 남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참고할 사회가 없으니까.
정말 사회적인 동물이야, 인간이라는 건.
그러니까 니케 상을 좋아하는 녀석은 이해할 수가 없네. 알아요? 사모트라케의, 목이 잘린 조각상. 대체 뭘 느낄 수 있다는 거야, 거기서. 그걸 보고 충격받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런 남의 감상이 좋다고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응, 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랑 별개로 나는 실마리가 잡힐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또 들여다보고 있겠지만요. 좋아하니까 말이야. 그럼 나중엔 이해하게 되겠지.
…아, 그 표정 걸작인걸. 아하하.
못 믿겠다고? 솔직하네에. 재미있는 표정을 보여줬으니까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로 할까? 이 세상에 어느 생물보다 널리 퍼진 동물이 바로 인간이야. 그걸 사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잖아요. 빨리 죽거나, 다 없애버리려고 애를 쓰거나, 적응하거나, 셋 중에 하나지.
그러니까, 괜히 난 사람이 싫다고 택도 없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순순히 인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어른스럽게 말야.
─2003년 7월 미술관
「기억에 없는 여름」 집필 배경 조사
2011년 12월 이케부쿠로
남자는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선다. 선선한 공기를 유지시켜주는 가습기가 부드러운 아로마 향을 실어왔다. 밤에도 절대로 불이 꺼지지 않는 방.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침대 옆에는 책상과 컴퓨터가 있고, 한켠에는 늘 검은 표지의 파일이 꽂혀 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책장 한 층도 채우지 못했다.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아직 어린 얼굴을 한 창백한 손가락이 한 권을 꺼내 펼치면 누군가의 이름 아래 드문드문 공백이 있는 연표, 자잘한 글씨가 누군가의 어투나 버릇을 알려줬다.
그건 사람의 표본이었다.
해를 넘기며 방의 위치도 가구도 바뀌었지만 저 파일이 든 책장만은 항상 있었다. 여러 명이 적혀 있던 책등의 이름은 단 한명의 것이 되기도 했고, 습격이라도 당한 듯 엉망인 날에는 몇 개가 줄기도 했지만 결국은 늘어나는 것이 빨랐다. 소설가란 사람과 가까워야 할 수 있는 직업이야. 편집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남자는 이 파일들이 꽂힌 책장을 볼 때마다 복잡해졌다. 이걸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아직도 인터넷 문화가 어색했고,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는 더욱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관계가 중요하다고 여겨 펜팔 같은 건 잘 다가오지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치지쿠의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그만큼 더 신경써야 해. 그런 건 귀찮죠? 너는 평범하니까. 험담이 아니야, 평범하다는 건 나한텐 죽을 정도로 지루하지만 보편적이라는 거고. 마루베씨는 그렇지이~, 과하게 눈치를 본다거나 그런 경험은 없지 않아?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서로 적당히 통하거나, 안 그런 사람은 또 적당히 배척하면 되고 말야. 새삼 또 관심을 기울일 생각도 안 들 거고, 그러니 이해하지 못하지. 매정한걸."
그런 감상과는 반대로 방의 주인이 때때로 비꼬듯 말하는 내용은 어투만큼이나 싫을 정도로 속내를 찔러왔다. 그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제 발로 나간 신참이 몇인지 세어보지 않게 된 지 몇 년이 지났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쭉 그가 담당을 맡고 있었다.
"그런 말을 조금만 줄여 주시면 아무 문제도 없으실 텐데요…."
"나랑 마주하는 건 기껏해야 주에 두세번인데, 그것도 못 버틸 정도면 오히려 다른 작가들이랑은 더 힘들 걸?"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고정 담당자가 된 지금도 때때로 신참 편집자를 이치지쿠 앞에 데려오면, 몇 번째에 '무리에요'라고 하는지에 따라 출판사에서는 따로 담당시킬 작가나 부서를 고르곤 했다. 측정기로 쓰는 것도 아니고. 이치지쿠가 재미있어하며 중얼거렸다. 아주 틀린 사용처는 아니라서 마루베는 잠시 말이 궁해졌다.
"왜 제가 작가님 담당일까요."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7살 정도 되는 자식이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마루베는 가끔 생각했다. 그걸로 설명이 끝날 만큼 귀여운 말도 행동은 아니었지만, 사람에게 미움받기 위해서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때로 당사자도 잊은 일을 짚어내는 불시의 호의와도 비슷한 행동에 맥이 풀리곤 했던 것이다. 사고를 친 강아지가 다리에 코를 밀어붙여 오고, 발톱을 세운 고양이가 한참 뒤에 그 자리를 핥아오는 것처럼. 그것은 말이 통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연결지어지기 어려운 행동들이기에 호의로 변할 수는 없었지만 완전히 싫어하거나 미워하기 곤란하게는 만들었다.
결혼기념일을 무심코 넘길 뻔한 것을 끔찍할 정도로 후벼대 한동안 이혼의 이 자만 들려도 노이로제가 걸리게 만들어 놓고, 양손에 올라온 선물은 아내가 전부터 가보고 싶어했던 크루즈의 티켓이거나 해서 남자는 화내지도 기뻐하지도 못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귀가길에 오른다. 생일 날 공들여 만든 케이크를 선물해 놓고 마지막에 뒤엎어 버리는 사람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아니면 뒤엎어 놓고 다시 선물을 주는 녀석은….
마루베의 성격은 호쾌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치지쿠가 평가한 대로 매정한 구석은 있어도 수고를 무시할 성격은 못 되었다. 본의 아니게 오래 본 사람이기도 하여 그는 때때로 이치지쿠에 대해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14년 전과 얼굴도 태도도 거의 변하지 않은 사람은 때로 붙임성 좋게 굴어 이런 조카가 있었나, 같은 현실감 없는 착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 원고를 가지고 온 이치지쿠를 본 것도 마루베였다.
"의미를 만드는 건 늘 사람이니까, 내가 해 줄 대답은 운 밖에는 없네. 그냥 담당자가 된 거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그런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겠지요, 부럽군요…."
"그건 재미없군."
삑.
신호음이 짧게 울린다. 남자가 생각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리면, 프린터기에 불빛이 들어왔다. 옆 책상 끄트머리 위에는 원고 뭉치가 올려져 있다. 느리게 인쇄된 종이는 이번에도 어딘지 비꼬는 듯한 말투로 요즘 그가 신경쓰는 일들을 나열한다. 아내와 싸웠던 것이나 최근 들어온 신입과 얽힌 일의 기타 등등. 더욱 어깨가 쳐진 남자는 쓴 물을 삼키는 얼굴로 읽는다. 맨 아랫단에는 자식의 생일을 축하하는 말이 버젓이 쓰여 있다.
책상 아래에는 아기자기한 포장에 싸인 선물 상자가 놓여 있다. 아마도 자신이 준비한 것보다 자식이 좋아하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포장된 선물을 같이 품에 안고 허리를 폈다. 약간의 한탄과 감사를 담은 메모를 책상에 붙이고, 이번엔 눈에 잘 들어오도록 다른 원고 뭉치를 올려둔다. 이번 신인 문학상의 수상자들이다.
편집자, 마루베 유사쿠는 종이에 적힌 대로 가습기의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양을 늘리고 현관을 나섰다. 선물 상자에 달린 팬시한 메세지 카드는 아이가 읽기 쉬운 히라가나다.
이치지쿠는 매우 알기 쉽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이라면 모두 그럴까. 마루베는 문득 생각했다.
무수한 문학, 혹은 영화와 같은 창작물과 역사 속의 평가들과 같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인 것이다.
1998년 3월 시라즈미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고함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치지쿠는 조금 쉰 웃음소리를 냈다. 코너를 돌아 인적이 드문 길에 다다르면 천천히 걸음 속도를 내리고 치마 끝을 손으로 가볍게 털었다. 오른쪽 옆의 가게에서 나온 손님이 깜짝 놀라 이쪽을 보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졸업생 대표 인사에서 또 규정에서 약간 어긋난 옷을 입고 오거나, 강당에서 적당히 폭죽을 터뜨리고 안내 방송을 헤비 메탈로 바꾸거나. 평소에 하던 일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인데 말이야. 졸업식, 마지막 날이니 적당히 무시해도 괜찮을 텐데 변함없이 꽤 끈질기게 따라오는 선생님에게 이치지쿠는 약간의 감탄도 느끼고 있었다. 잡히면 아마 위험하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어른이 되면 최소의 보호도 없고 여차저차. 생각하니 지루하지만, 동시에 좋은 선생님이라고도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진지하게 화낼 수 있다는 건 그런 거니까. 이치지쿠는 그렇게 화를 내 본 적이 없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니까!"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녀석이 곧잘 투덜거렸다. 선도 담당인 하세다 선생님은 유명한 골초였기 때문에, 저 말은 불량학생들의 유구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경우는 애초에 너희가 위법인게 나쁘지만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이런 면이 있다. 자신에게 관대하다고 할까, 그런 거 재미있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해. 그 말은 그대로 이치지쿠 본인에게도 해당되었다. 비꼴 때에 자주 지적하는 말이지만, 뭐어. 자신은 뭐가 벌어지든 화내긴 커녕 진지하게 마주할 생각도 없으면서 비슷하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재미없어한다거나 그런 거지.
수많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졸업식의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 벚꽃이 만개한 거리. 이치지쿠는 양팔을 벌리고 힘차게 발랄하게 걸었다. 폭신할 정도로 깔린 꽃잎은 발을 뗄 때마다 부산스레 휘날렸다.
어디든 학교란 그렇지만, 시라즈미에도 참 다양한 학생들이 많았다. 개성이 있다고 해도 좋고. 등교 거부 학생이 늘어나고 히키코모리가 생기던 1990년대에서 집에 틀어박히는 게 아니라 거리로 나오는 학생들은 비교적 특이한 편이었다. 말하자면, 레어 캐릭터가 많았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행동하거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지향점도 성격도 전혀 다른 인물들이나. 단순하게 말하면 전혀 특이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세상의 진리란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죽어 없어진다는 것과 같겠지 하고 이치지쿠는 고개를 기울였다.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도 레어 캐릭터는 있다. 깊이 파내면 누구나 멀쩡하지 않은 구석이 있으니까. 멀쩡하다, 평범하다, 애초에 그런 건 환상이고. 평범이란 대체 무엇인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게 더 알기 쉬울 텐데. 텔레파시라도 하듯 서로 대충 통하는 게 있어서, 예상 그대로의 반응을 반복해서 돌려받고 편안하면서도 심심하게 여기는 그런 감각.
본인은 평범하다 자신하고, 그것에 낙담하거나 안도하거나 자랑스러워하는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말로 '평범함'을 정의할 수 있는가. 이치지쿠는 문득 코웃음을 치고 작은 충격에 몸을 흔들었다. 꿍, 허리에 무언가가 부딪힌다.
"잇쨩!"
"…카나타. 너 말야…. 왜 혼자 온 거야?"
시선을 내리자 허리를 끌어안은 소년이 발을 제자리에서 동동거렸다. 이치지쿠는 정수릭 보이는 머리를 적당히 쓰다듬고 이마를 살짝 뒤로 밀었다. 드러난 얼굴에는 예상대로 콧물이 흐르고 있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꽃가루 알레르기랬나. 아, 귀찮아. 주머니에 손수건 꽂는 건 유치원 때 졸업해야 할 텐데 말이야. 생각과는 달리 부드러운 손길로 손수건을 집어 코를 한 번 닦아주자 카나타가 응! 하며 꽃다발을 내민다. 수국과 장미가 풍성한 꽃다발에서 풋내가 났다. 하필 얘가 이걸 들고 있다니. 콧물 때문에 코가 막혀서 숨을 못 쉰다고 우느라 정말 호흡곤란까지 갔던 기억은, 아마 잊지는 않았겠지만 꽃을 조심해야 하는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멍청이. 동생에게 가차없는 평가를 내리고 이치지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보다 이건 무려 세 번째나 되는 졸업식의 꽃다발인데, 왜 매번 이렇게나 화려할까? 꽃다발의 형태로 애정을 나타내는 걸까. 그런 걸로는 알 수 없는데. 이벤트에 들뜬 걸수도 있겠지. 생각할수록 이벤트는 뭐든 상술이다. 거기에 맥아리없이 휘둘리는 사람들은, 뭐, 재미는 있었다. 이치지쿠는 꽃다발을 둘러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대학교 졸업 때는 뭘 주려나.
"갑자기 사라져서, 다같이 찾는다고, 카나타 착하니까 왔어!"
"전~혀 아니네요. 너 완전 문제아야."
미아가 될 뻔 했잖아. 꽃다발을 낚아채고 다시 걷기 시작해 휘적휘적 흔들리는 팔을 카나타가 매달리듯이 끌어안았다.
"저기, 무거워. 비켜. 제대로 걸어. 카나타, 몇 살? 이제 곧 초등학교 졸업이지? 초등학교 졸업해도 혼자 못 걸어? 바보야?"
"잇쨩이 괴롭혀…."
카나타는 금세 우는 소리를 냈다. 너무 괴롭혔나 생각하면서도 이치지쿠는 카나타가 매달린 팔을 귀찮은 듯이 흔들다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안았다. 카나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치지쿠의 목에 팔을 휘감고 다리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버릇이 없네. 잇쨩이 아니야. 이치지쿠 누나라고 해."
"아니야! 역시 형이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했어!"
"흐~음, 그래? 언니도 오빠도 불러놓고 이번엔 무슨 자신감으로 아니라고 해?"
"으으……."
언니 누나 오빠 형, 아무렇게나 바꿔대며 가르치는 이치지쿠 때문에 카나타의 호칭은 엉망진창이었다. 매년 우메─주변에 사는 8년살 위의 친척─나 이치지쿠가 학교에 데리러 갈 때나 집에 친구들이 놀러오면 연례행사처럼 '너 이상해!' 소리를 듣는 게 카나타의 연례행사였다. 그러면 그때 있는 사람이나 복장을 보고 친구들이 그럴 땐 형이라고 불러야지, 누나라고 불러야지, 하는 말에 적당히 또 휘둘리는 카나타를 구슬리면 다시 원점 회귀.
"…이치지쿠 누나?"
이번에도 자신감이 부족한 듯 말하는 카나타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 이치지쿠는 바로 비웃는다.
"너 바보지?"
"또 거짓말!!"
"맞다고 한 적 없어, 그렇게 하라고 했지."
이녀석은 가족한테는 의심이라는 게 작동하질 않나 봐.
아마 너무 괴롭힌 것 때문이겠지 하고 이치지쿠는 다시 생각한다. 변덕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카나타는 단순하게 당장 들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버릇을 익혔다. 나중에 살기 힘들 것 같네. 남 일처럼 생각하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우메 쨩한테 이를 거야……."
"너보다 내가 신뢰받고 있답니다아."
"잇쨩은 더러워!"
"헤에,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그런데 지금 울고 있는 네 얼굴이 더 더러운데? 누구한테 더럽다고 하는 거야?"
와, 진짜 울기 시작했어. 엉망이 된 얼굴을 적당히 닦아준 다음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고 아이의 등을 가볍게 한 번 친다. 찰싹.
어느새 다시 학교에 가까워지는지 언뜻언뜻 비슷한 교복이 눈에 뜨이고, 아까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가족이나 친구들과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오늘은 레스토랑에서 먹자, 잠깐 여행 가자, 꽃다발 기뻤어 등등. 인간이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의외로 잘 흘리고 살아가는 거다.
"우메쨩한테 이를 거야!"
"또 그 소리야?"
우메는 조금 대하기 서툴다. 귀찮아지기 전에 조금 달래주는 게 좋을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줄 테니 잠깐 들렀다 가자, 고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문득 거리가 조용했다. 등교길의 골목을 사람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높이 자란 나무들에 그림자가 진 길이었다. 아직 벚꽃잎이 휘날려 화사한 광경에서 혼자 우중충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학생이 있었다. 이치지쿠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학생의 주변에는 부모님도 없다. 빈 손이다. 얘한테 꽃다발을 주면 무슨 얼굴을 하려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한 발짝을 떼었을 때다. 그 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고, 이치지쿠를 바라보고, 단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야아, 환대 고마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삼키고 이치지쿠는 우선 빙그레 웃었다. 반대로 더 깊어지는 얼굴의 짜증을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에 그제야 이치지쿠가 즐겁게 손뼉을 쳤다. 저 걸음을 보고 떠올렸다. 몇 개월 전에 같은 반 아이를 괴롭혔던 녀석이다. 이치지쿠가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왜 이런 데 혼자 있어? 꽃다발은? … 혹시 못 받았니? 하긴 너희 집 부모님은 굉장히 착실한 분들이니까 말이야. 같은 반 친구를 괴롭혔다느니, 특히 요즘은 사회문제로 엄청나게 대두되고 있는데 그냥 넘겨줄 리가 없겠지."
"내가 뭘 했는데?! 그건 이지메 정도도 아니잖아! 나보다 심하게 괴롭히는 녀석들도 잔뜩 있단 말야!"
"전자는 어찌됐건 후자야 뭐. 나 중학생 때 애들이 더 심했던 거 같긴 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야. 근데, 그냥 좀."
마침 그때 궁금했을 뿐이다.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성립하는 우정이라는 건 얼마나 갈지, 학급 분위기라는 건 어떻게 뒤집히는지, 반에서 위치가 정 반대가 된 녀석들은 어떤 심경이고 무슨 표정을 할까. 중학생 때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나 괴롭힘당하고 있나? 얘들은 자기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나? 그 정도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아픈 거나 괴로운 건 평범하게 싫었지만, 뭐랄까. 사고를 모르겠다고 할까. 의미 불명이라고 할까. 나만은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대책 없는 자신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해졌다. 그보다 너희는 존재 자체로 날 괴롭히고 있으니까 별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그러니까 새삼 궁금해졌다.
"궁금하잖아, 그런 거. 사실 이 녀석이 착했다면, 나빴다면, 이런 짓을 했다면 하지 않았다면…. 너희들 왠지 그런 거 좋아하지. 뭔가, 가능성? 뭐 실현될 일은 거의 없으니까 너희가 하는 건 망상에 가깝지만."
문득 이치지쿠는 덜덜 떨고 있는 카나타를 눈치채고 어르듯 가볍게 상체를 흔들었다. 옳지, 옳지. 넌 바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궁금해서? …그냥?! 너 때문에, 내가,"
"왜 혼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나 혼나는 거 싫어하는데…. 그보다, 너도 그냥 그 애가 마음에 좀 안 들었던 거잖아?"
똑같지? 아무튼, 그냥 운이니까. 마침 요즈음 학교 이지메가 얼마나 발생하고 있는지, 통계가 어떻고 사회 문제가 어떻고 하는 기사가 나올 즈음이었다. 학년에 꼭 한둘씩 있었던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을 모아서 기자에게 던져 준다거나, 재미 삼아 찍고 있던 학교 사진 중에 맞고 있는 모습이 딱 나왔다던가 그런 요소가 다 걸쳐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은 많다. 소재가 좋았던 거겠지. 현직 교사 둘의 자식이, 뭐 그런 거. 알고 한 거지만 말이야. 요즘 시대에 있구나, 그런 사람, 하고 기묘한 감상에 취한다. 있구나, 가족보다 그 신념이라던가 하는 걸 중요시하는 사람. 신기하네. 매정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착실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뭐 둘 다겠지.
아마도 점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을 것이다. 눈 앞의 학생의 얼굴이 또다시 다르게 일그러지고, 아, 울고 있군, 생각하면 다시 성큼 특징적인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온다.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러나자 쫙 뻗은 손가락이 코끝을 스쳤다. 안경이 끝에 걸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왜 문제를 또 일으키려고 해? 너 정말 학습이 더디네. 바보같은 우리 동생도 한번 아픈 꼴을 당하면 다시 같은 짓을 하지는 않는데."
"시끄러워!"
외치는 말에는 패기가 없다. 울고 있어? 그렇군, 누구나 자기 상처는 애처로운 법이다.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이는 비웃어놓고, 참 모순적이다. 그런 거 재미있지만 말이야. 논리적이지 않잖아. 이치지쿠는 소리내 웃고 다리를 뻗어 학생의 배를 걷어찼다. 싸우는 건 전혀 특기가 아니지만, 이리저리 도망다닌 덕분에 선수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각력은 좋았다. 그리고 아마 경험. 어디를 차면 무너지기 쉬운지 알고 있어. 반면에 그는 싸움을 즐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잔뜩 앞으로 기울인 상체가 얻어맞자 단번에 크게 휘청이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두 번 뒤로 크게 뛰어 물러난 이치지쿠가 그런 소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늘 졸업식이잖아."
여기서 그만 하자, 부모님이 기다리신단 말이야. 반 이상 고의로 내뱉은 말이었다. 주저앉은 세라복에 감싸인 어깨가 크게 한 번 떨리고, 손끝이 바닥을 긁는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곧 재포장을 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떠올린 건 덜걱이는 바닥에서 소녀가 벽돌을 파낸 순간이었다.
양손으로 쥔 팔이 뒤로 한껏 넘어가고, 곧 흙이 묻은 벽돌이 손끝을 떠나는 걸 보고 이치지쿠는 재빨리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쉭,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조금 떨어진 곳의 바닥에 벽돌이 부딪혀 깨져 경쾌한 소리가 났다. 오오우나바라아, 하고 내지르듯 외치는 고함 소리에 길 끝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본다. 이치지쿠는 코너에 있는 반사경을 통해 왜곡된 표정을 한번 바라보고 소리내 웃었다. 웃음이 겨우 잦아든 건 어깨가 축축해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카나타, 울지 마."
"그치만, 그치만…."
무서운걸, 울음 섞인 말에 이치지쿠가 픽 웃는다. 바보같은 애야. 무서워할 일이 뭐가 있담. 네가 다칠 리가 없잖아. 그랬다간 나도 혼나, 너만은 다칠 일 없어. 하지만 그걸 알려준다고 울음을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요즘 얘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지, 귀여운 강아지라던가 산책 중인 사람 없을까 주변을 둘러보지만 오후의 등교길에는 사람만이 잔뜩이었다. 고함을 뒤로하고 달리는 이치지쿠가 그냥 적당히 울게 둘까 생각할 때였다. 얘는 가족 말이면 대부분 그대로 믿으니까. 적당히 구슬려도 되지 않을까, 하고.
"괜찮아,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이치지쿠는 조금 생각하기 귀찮아져 적당한 단어를 내뱉었다. 친구야, 쟤는. 어린 아이들의 마법의 단어 등장. 그러고 보면 학교의 도서관에는 그런 소설들이 많았다. 자연스레 학교를 배경으로 해서, 이렇게 싸워도 멀쩡할까 궁금할 정도로 싸워 놓고 '친구잖아' 한 마디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것들.
그걸 그대로 믿고 실려간 녀석이 누구였지? 아무튼, 어린 아이는 커녕 중고등학생에게도 그런 내용은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그냥 해피 엔딩을 좋아하나 봐. 이치지쿠는 짧게 평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그 캐릭터는, 뭐 객관적으로 보면 이상한 놈이었지만 좋아했다. 싫어하는 캐릭터 같은 건 없지만. 생각도 행동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싫어하기엔 이치지쿠도 그냥 사람이었다. 훤히 알 수 있는 쉬운 것에 약하다는 말이다. 쾌락 원칙. 사람을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야 하는 것 중 하나고, 이치지쿠는 물론 그것에 매우 충실했다.
"…친구?"
의아한 목소리에 이치지쿠는 즐거이 긍정했다. 발이 훌쩍 넓은 보폭으로 다시 땅을 박찬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꽃다발이 풀어헤쳐져 한송이 두송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그래, 친구야. 이치지쿠는 문득 지어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카나타, 애들이랑 놀 때 다치기도 하지. 싸우기도 하고. 금방 화해하니? 아니지? 사이 좋은 애일수록 싸울 때는 힘들잖아? 오히려 엄청 심한 말도 하고 주먹질도 하고. 그래, 그런 거야. 게다가 가끔 있거든, 지금도 돌이나 물건을 함부로 던지면 안 된다는 걸 까먹는 애들이 말야. 응. 위험하지? 알려줘도 금방 잊어버려. 할 수 없지. 그래도 바보라고 친구를 안 할 수는 없잖니. 사람 대하는 게 죽을 정도로 서툰 애거든. 그리고 또, 카나타, 공부 싫어하지. 쟤네 집이 엄해서 말야…."
매일매일 힘들어서, 저도 모르게 남한테 짜증이 튀는 거야. 사실 저 애는, 사실은, 사실은. 거의 소설이로군. 이치지쿠가 문득 웃으며 생각했다. 친구라는 점을 빼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면 이치지쿠는 어쩐지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말끝이 둥글어진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처럼. 그러게, 이치지쿠가 다시 생각했다.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말하는 너는 좋아할 것 같아. 그런 착각은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것은 설득이다.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줄래?"
문득 카나타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치지쿠가 아직 어린 아이 특유의 부드러움이 남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인파 속으로 뛰어든다. 그래, 너무 미워하지는 마. 그건 힘들어. 미워하는 것도 진지하게 바라봐야 가능한 일이고, 저 애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없으니까. 3분 거리에 익숙한 마트가 있다. 카나타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그리고….
"잇쨩 친구, 울었는데, 아픈 걸까아?"
"아픈 걸까~."
"나으면 좋겠다."
순진한 목소리가 걱정을 내비친다. 이치지쿠는 문득 좀 더 크게 소리내 웃고 싶어졌다. 얼마전에 키가 허리까지 자란 카나타는 계속 들고 달리기에는 좀 무겁고,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이 답답해 어딘가로 터뜨려 놓고 싶었고, 또 그러고 싶지 않아 입을 벌리고 숨만 한 번 크게 들이쉰다. 자, 이제 네가 걸어. 내려주자 카나타는 순순히 바닥을 딛고 손을 뻗어온다. 작은 손을 맞잡고 이치지쿠는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며 생각했다.
소설가가 되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
…세상에는, 생각이 적은 사람이 많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사고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되었다.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혹은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안 되는 쪽이 이상하다. 절대 다수의 법칙.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문제는 제기되었으나 사회는 기본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치지쿠는 평범함을 재능으로 정의했다. 평범하지 않은 것들은 특출나다, 뛰어나다, 그렇게 말하면 듣기에는 좋으나 결국은 모난 돌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자라면서 뛰어난 면모를 잃는 것은 어찌 보면 살기 위한 선택이다. 특이함, 이콜 뛰어남은 감탄은 할 수 있어도 애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누구라도 굉장하지만 나와 함께 울어줄 수 없는 사람보다는 서툴어도 같은 때 울고 같은 때 웃는 사람을 고르기 마련이다. 특이함이란 공감의 정 반대에 서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지도 몰랐다. 대화와 토론, 매 순간이 남과 연결된 곳에서의 삶을 이치지쿠는 상상하기 어렵다. 떠올려 보려다가 잠시 구역질이 나서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이는 새에 잊어버리기로 한다. 그런 한편으로 멋진 세상이라고 순순히 인정한다. 인가는 다소의 고난을 감수할지언정 완벽하게 동떨어져 살 수는 없는 생물이니까. 그리하여 각자의 특이함을 버리고 천편일률적으로 다듬어져가는 인간의 표면을 이치지쿠는 가끔 비웃고 싶어서 참기 어려웠다. 비웃고, 아무리 해도 없애지는 못하는 특이한 파편을 찾아내 재미있어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멍청함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답답하지 않았어? 다시 전으로 돌아가려고? 헤에, 그래. 부득불 다시 섞이려고 애쓰는 걸 보면서 이치지쿠가 발치의 돌을 툭 차서 굴린다.
그런 너희가 진절머리 나면서 좋은 거 같아. 아마도 말이야. 중학생 때라면 몰랐겠지. 아는 만큼 보인다. 그것은 어디서든 변함없이 적용되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마침 아이스크림을 파는 대로 옆의 작은 마트에서는 원고지도 팔고 있어서, 이치지쿠는 그날 별 고민도 하지 않고 몇 매를 산다.
종이 봉투 안에 든 원고지와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 옷과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들러붙었던 벚꽃, 팔에 매달려오는 조금 무거운 동생의 무게. 3월의 바람이 치마자락을 스치고 대충 쥔 꽃다발이 거의 다 풀려 휘청이면서 걸었던 길. 졸업식의 주인공이 없다며 발을 구르던 부모님을 향해 장래를 정했다고 툭 내뱉었던 오후 1시. 카메라의 렌즈가 빛을 반짝였다.
"카나타, 너무 고개 돌리면 안 돼~."
"으응…."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알면 된다. 이해할 수 있는 일면을 찾아내면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알수록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짚어내는 것도 그런대로 수월해졌다. 결국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크게 차이나진 않으니까. 다행히 이치지쿠는 진로에 고민이 없었다. 안 되면 뭐어, 일단 진학한 과로 취업하던가 할까. 취미니까. 사실은 적당한 곳에 투고하는 정도로도 좋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게 되는가. 실제하는 사람이라면 손가락질 당할 캐릭터가 인기를 얻어 어떠한 사회 현상이 되었다고 알리는 작은 기사를 이치지쿠는 신기하게 잘라내 노트에 붙였다. 보니 앤 클라우드 증후군, 하이브리스토필리아 같은 말도 있었지만. 그것도 범위는 있겠지. 사랑할 구실은 필요하다. 의외로 외모와는 관계가 없다고 해. 얼마나 자주 대중에게 노출되었냐의 문제지. 많이 보면, 사람은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점을 찾는다. 그것이 때로 의미 모를 애정으로 연결된다. 알수록 사랑하게 된다고 하고, 사랑하니까 더 알고 싶다고 해. 1
알게 된다면 정말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 뭐, 별로 영원한 걸 바라지는 않았다. 한 순간의 순수한 애정이면 충분했다. 그렇다고 뭐 누굴 묶어놓고 얘는 이런 애라고 알려줄 수도 없고. 스톡홀름 증후군은 순수하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이해하고 싶게 만들려면, 그야 이야기가 가장 형편이 좋았다. 사회 질서랑은 전혀 딴판이니까 문제가 될 수도 있으려나. 그렇겠지, 딱히 상관 없다. 일단 이치지쿠는 이게 궁금했다. 그래서 혹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면야.
그럼 나, 누구든지 좋아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걸 반복하다보면 어쩌면 말이야. 그러면 뭐, 이치지쿠는 동생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너를 아껴줄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어깨를 으쓱였다.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것 정도야 할 수 있게 되겠지. 딱히 계산하지 않아도 말이야, 뭐,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꽃다발을 고쳐안고 자신을 끌어안아오는 여자를 흘끔 바라본다. 8살 위의 우메다. 가족이란 건 뭘까. 이치지쿠는 별다른 차이를 모른다. 오래 봤을 뿐이잖아. 다치거나 아프다고 해도 그래서 뭐? 라고 물어보게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러면, 어릴 때부터 봐온 그녀가 아플 때 순수하게 걱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앞에서 자신을 찍고 있는 부모님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저 사람들을 꼬옥 끌어안고, 볼에 뽀뽀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사랑한다는 말에 그게 뭔데?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도 그래, 하고 거짓 없이 말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안경이 없어 선명해진 시야에, 문득 올라오는 기분나쁜 구토감을 참고 이치지쿠는 빙그레 웃었다. 찰칵이는 소리가 난다. 그렇지, 꽃다발은 전부 뜯어서 줘 버리자. 미사키에게는 우편을 보내고, 치구사는 전에도 수국이 가지고 싶다고 시끄러웠으니까. 선생님에게도 하나쯤 주면 좋을지도 모른다. 벌레 씹은 얼굴을 하겠지. 야츠모는 이미 돌아갔으려나.
"잇쨩, 졸업 축하해애."
"또 콧물 흘리면 안 안아 줄 거야."
어찌됐건, 마지막은 정석적인 졸업식의 한 장면이었다.
2012년 1월 이케부쿠로
"뭐랄까, 그게 틀린 예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야."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작가님?"
평소와 같은 옷─아니, 소매가 좀 더 길었다. 동복일까?─을 입고 간판을 세운 이케부쿠로 명물 아키가 마찬가지로 이케부쿠로 명물 이치지쿠에게 물었다. 절찬리에 영업 중. 최근 몇 년간 그리 변하지 않은 광경을 턱을 괴고 보면서 이치지쿠는 응~, 이라거나 흠~이라는 등 의미모를 의성어를 냈다. 아마 변변찮은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아키는 경험에 의거해 생각하며 간판을 높이 든다.
"아키 군 말이야~."
"네, 작가님."
"뭔가 있지, 아키 군한테 물어보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보기는 하는데."
어째서 작가님은 변함없이 그런 태도이신 걸까요, 단지 의문이 담긴 목소리에 이치지쿠 또한 순수히 놀라며 대답한다. 변할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렇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인생이든 가치관이든 변할 일이 몇 번씩 있었지만 그 채팅방에 모인 사람들은 이케부쿠로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이상한 사람들이었고. 개중에서도 이 둘은 캐릭터성이 짙은 사람 중 하나였다. 칼부림이니 항쟁이니 새해 이벤트니─혼자 과하게 평온한 이벤트였지만─같은 일로 변화를 겪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할까.
그러므로 2012년에도 아키는 여전히 거리에서 메이드복을 입고 해결사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고, 이치지쿠는 거리의 벤치에 앉아서도 굳이 신발을 옆으로 치워 놓고 맨발에 백의니 하는 기묘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조금 추웠지만.
"아키 군, 행복이란 뭘까?"
"글쎄요."
아키는 조금 생각하고 보편적인 정의를 따라 읊었다. 11월에 들은 것과 아직 크게 다를 바 없는 대답에 이치지쿠가 조금 웃는다. 거봐, 물어봐도 의미가 없지.
"너에게는 기준이 되는 자신이 명확하게 없으니까. 주관이 필요한 문제는 대응하기 어렵지? 차라리 행동해야 한다면 그거대로 답을 내리기는 할 테지만 말이야. 참, 트롤리 문제라고 알고 있나?"
"작가님이 그런 얘기를 하면 정말 저지를 거 같으니까 그만둬주세요."
"그럴 것 같다, 지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 난 순수하게 구경만 하는 건데 참 이상하지, 오해를 많이 사."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 아키를 알아본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지나갔으며, 이치지쿠에게는 학생 몇이 다가와 떨떠름하게 감사를 표하거나 활기차게 말을 걸고 사라졌다. 명물이시네요. 그쪽이야말로. 연극이라도 하듯 짧은 인사말이 아키와 이치지쿠 사이를 오갔다.
"호기심이 강하시니까요."
"너도 은근히 양보를 안 하고. 주장은 약한 편이지만?"
11월 후반, 어느 밤중 가로등 아래 놓인 상자의 소재지를 가지고 세 명이 모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순수하게 구경을 한다'는 말을 믿기는 어렵다고 아키는 생각하고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는다. 이치지쿠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신발을 신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빨리 돌아가시네요. 혹시 맡기실 의뢰는 없으셨나요?"
"이동 수단? 업어줄래? 라고 하고 싶은 도중이지만 혼자 가고 싶으니까 오늘은 됐어. 그거 외에도 하나 정도 있기는 한데, 아직 누구로 할까 못 정해서? 정해지면 다시 올게."
"그러고 보면 오늘은 스스로 서 계시죠. 정말 별일이에요. 그보다, 네, 저는 불법적인 거나 위험한 건 받지 않고 있지만요"
"신뢰가 없네에. 그런 건 자의로 해야 재미있는 거니까 뭐. 음~, 너는 굳이 시켜보는 게 그 '자의'를 보기 좋을 것 같지만 말야."
아키가 말없이 이치지쿠의 허리 부근을 바라본다. 음, 휠체어 손잡이가 있는 위치로군. 제 발로 걷는 건 실로 낭비로 느껴지곤 하는 요즘이지만 이전 겪은 전력질주에 강제로 납치될 가능성이 차단된 것은 조금 마음에 들었다.
"전력 질주는 이제 잊어버려."
"색다른 것도 가끔은 좋으니까요. 추천드려요."
그건 그거고, 넘어질 것 같다고. 아픈 건 싫어. 변함없는 말을 내뱉은 이치지쿠는 문득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나잇살 먹은 어른이 길거리에서 하기에는 좀 그런 행동이었으나 애초에 복장부터 그런 걸 따지고 있는지 모호한 인간이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키는 별다른 감상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으며 가졌다고 해도 굳이 말할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아키 군, 텐쿠 군이랑 같이 살게 됐다고?"
아키는 웃는다. 평소와 같이 그림자가 진 얼굴이었으나 아주 살짝 다른 기색이 엿보였다.
"호쿠토 씨요."
"그래, 그래. 그나저나 의외로 궁합이 맞네에. 삼투압 현상 알아? 그는 인식은 흐린데 자아가 확고하니까 말이야. 너와는 반대지. 부족한 부분만큼 옮으면 재미있는 인간이 될지도 몰라."
작가님의 '재미있는 인간'은 어쩐지, 하고 아키는 말을 줄인다. 뒷말을 예상하기라도 하듯 이치지쿠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를 구한 만큼 구하지 못한 사람이 늘어난다거나,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다거나. 정의나 선악도 개인적인 일로 가면 뭐 비슷하겠지. 어차피 선악 같은 건 사람마다 별개고, 그렇다면 기왕 같은 거 재미있는 쪽이 좋잖아.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그쪽이 말하는 재미있다는 인생이 망했거나 곧 망할 것 같은 둘 중 하나잖아?"
"오모키 군은 어쩌다가 날 이렇게 오해하게 된 걸까나아…."
"이케부쿠로 거리에 불이 난 다음부터?"
우후후. 골동품이 가득 찬 가게에서 마주 본 채 웃고 있던 둘은 비슷한 시기에 어깨를 으쓱인다. 뭐 그건 됐고. 오모키 또한 가로등 아래서 모인 셋 중 하나였으므로 말하는데, 기적적으로 불도 넓게 번지지 않았고, 그런대로 사건도 마무리 되기야 된 데다가 애초에 오늘은 주문한 물건을 받으러 온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였기에 분위기는 날카롭지 않았다. 오모키가 영화에서나 봤을 것 같은 알루미늄 가방을 내려놓자 이치지쿠는 일부러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는다. 와아, 멋져~어.
"왠지 짜증나네…."
"사장니임, 서비스 정신, 서비스 정신."
딸칵이는 소리와 함께 열린 가방 안에는 피스톨이 하나, 머스킷이 또 하나. 안전장치가 걸린 것을 하나씩 들어보고 이치지쿠는 속으로 쓰게 웃는다. 대충 3.5 kg이랑 700g 정도이지 않을까. 머스킷은 무리. 응, 딱 봐도 무리다. 손잡이를 들어보려다가 바로 포기하고 피스톨을 들어올린 팔이 조금 떨린다. 책 세 권보다 무겁잖아. 무리무리. 안돼. 힘들어. 귀찮아.
"음~, 역시 있는 걸 쓰기 어려운 건 좀 뼈아프단 말이지이. 어쩔까, 야츠모 군 한테 줄까. 뭐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저주 걸린 걸 남 주려고?"
"아, 맞다. 에…, 그럼 안 되나? 어쩌지. 이거 무슨 저주인데? 아하하, 그나저나 초현실적이군. 저주란 말이지…."
종적으로 인간이 아닌 소년이라던가 저주같은 쿠츠나기라던가, 이미 초현실적인 게 넘쳐나는 이케부쿠로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초현실적인 물건을 구해온 판타지틱 골동품점 사장 오모키가 피스톨을 한 번, 머스킷을 한 번 가리켰다.
"유명한 사람을 죽여서 같이 유명해진 녀석이랑, 소유주한테 불행한 일이 닥쳤다는 녀석?"
"피렌체 다이아몬드 같네. 그런데 나 나름대로 유명한데 말야, 게다가 원래 운도 별로 좋지 않은데 이거까지 가지고 있으면 큰일 나거든? 뭔가 조합 절묘하지 않아? 이런 저주는 좀 더 인생을 바르게 살아온 녀석한테 줘야 구마되는 거야, 오모키 군."
"어머, 저주 달린 걸로 구해달라고 한 건 너잖아? 게다가 무슨 내용이든 저주라면 똑같은 말을 들었을 것 같은데."
"으응~, 뭐 그건 그렇지이."
괜히 해본 말인지 이치지쿠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받은 듯이 긴 총신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머스킷은, 뭐, 이건 선물용으로 할까. 어떻게 운이 나빠질지는 몰라서 궁금했지만 안타깝게도 신년 이치지쿠의 오미쿠지는 대흉이었다. 운이니 저주니 하는 걸 믿는다면 이번 년도는 피하는 게 좋다는 말이다. 대길이라고 해도 대흉에 저주받은 총까지 함께하면 감당 불가일 거 같고. 그럼 누구한테 주는 게 재미있을지는 조금 고민이 필요하지만 다행히 이치지쿠가 아는 사람의 대부분은 뒤가 없는 인생들이었다. 아무한테나 줘도 뭔가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이번에도 누가 죽을 수도 있겠지. 넨 군 닮아가는 건지 원래 그런 애들이 모이는 건지는 몰라도, 금의야행에 소속된 아이들은 그런 일에 고개를 잘 내민단 말이야. 그때 무슨 얼굴을 하려나.
오모키의 특징에 대해 묻는다면 거리의 사람 100중 100이 헌팅을 고를 것이다.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네요, 라던가. 단 그것은 딱히 누구라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문이 넓은 거지. 문턱이 낮다? 헷갈릴 정도로 극단적이게 말야. 알기 쉬운 예시로, 오모키에게는 금의야행이라고 하는 확고한 바운더리가 있었다.
아마 내가 해부하겠다는 게 그 애가 아니었다면 그리 끈질기지도 않았겠지. 뭐할 지 눈에 뻔히 보이는 나한테 총을 파는 것도 그렇고. 이치지쿠가 무심코 웃었다.
"네가 사람을 차별해서 참 다행이야."
아? 금의야행에 한 몸 담근 티가 나는 오모키의 짜증스러운 되물음이 돌아와 이치지쿠는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참, 오모키 군. 머스킷 하나 더 주문할게?"
"아까 뭔가 싫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야, 근데 있지, 이건 최대한 예쁜 거. 장식품으로 보이는 거 있잖아, 뭔가 반짝이고 근데 쓰면 총 나가는 녀석. "
"쏠 생각밖에 없니?"
"뭐 네가 잡혀가는 건 나도 본의가 아니고? 제대로 비밀로 할 테니까아."
오모키가 잠시 침묵하다 말한다. 긴 앞머리가 슥 기울여진다.
"있지~, 왤까?"
그쪽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는 게 더 미심쩍단 말야. 제대로 봤네. 이치지쿠는 대답 없이 오모키가 같이 내밀어 준 메모지에 어딘가의 주소를 작성했다. 쓸데없이 유려한 글씨였다. 하나는 머스킷 보낼 곳. 하나는 피스톨 보낼 곳. 둘 다 집 주소는 아니다. 빌딩? 하나는 골목이고.
"뭐 이건 진짜야, 너는 경찰에 잡히지 않는 쪽이 재밌고."
구석에 놓여져 있는 고풍스러운 시계의 추가 느리게 움직인다. 아, 그래. 메모에서 손을 떼자 오모키는 가볍게 대답하며 다시 주소를 들여다본다. 굳이 둘로 나눠 보내는 데다가 장소도 좀 수상쩍기는 했지만 일은 일이다. 배달하는 건 자기가 아니기도 했고.
"오모키 군, 네 행복은 뭐니?"
"어쩐지 대답하기 꺼려지는데. 그야."
말을 하는 사이 돈을 지불하고 다시 가방이 닫힌다. 오모키다운 대답에 이치지쿠는 픽 웃고 손을 뻗어 가방의 잠금장치를 마저 잠근다. 딸칵. 딸칵, 딸칵.
이 소리는 가끔 펜을 누르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스프링을 써서 움직이는 거니까, 원리가 비슷한 거겠지, 소리가 비슷해도 이상하지 않다. 키보드의 자판 소리도 비슷했던가. 가게 문을 나선 이치지쿠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가게를 발견한다. 세탁소. 뭐 지금은 쉬었다 열었다 영업일이 자유분방하다 못해 랜덤 가챠같은 가게지만 오늘은 영업날인 모양이다. 기가 막히게 끌려가고 있는 사케시와 끌고 가는 중인 시로코를 맞딱드리고 이치지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핸드폰을 열었다.
"네, 치~즈."
"…뭐야?"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굳이 방긋 웃어준다.
"너희야말로 뭐 하는 중인데? 아, 이거 좀 현대 행위예술로 보일 정도로 잘 찍혔는걸. 오는 도중에 신고 안 당했다면 그거 때문일 거야."
"쓰레기 수거 중이야."
"너도 들어가려고?"
"지금 당장 같이 봉투에 담아줘?"
"싫다아, 그렇게 큰 봉투 안 팔아요~."
사냥감을 이미 하나 잡은 시로코는 잠시 고민하듯 이치지쿠와 사케시를 번갈아 보고 피식 웃는다. 뭐, 어때…. 한가하고…. 한놈부터 조지자. 편리 우선. 안 그래도 어차피 시로코에게 있어 이치지쿠는 근시일 내 객사할 것 같은 인간상이었으므로 비교적 관대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곧 죽을 녀석한테 너그러워지는 건 어렵지도 않고. 다시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거, 옆에서 보면 이상한 조합이거든, 진짜로. 왜소한 여자가 덩치 큰 남자를 질질 끌고 골목을…. 응, 적어도 모범생처럼 생겼다면 몰라 끌려가는 남자도 문신이 대문짝만하게 보이고. 두 명 한 조로 위험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아무도 신고하지 않을 법 했다. 적당히 사정을 아는 이치지쿠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세탁소 끌고 가서 뭐 할지 좀 궁금하고. 뭐 죽진 않을 거고.
이게 낙관적인 예상이라기엔 그렇게까지 능동적이진 못한 게 시로코였다. 만약 그런 결말이 나면 그거대로 재미있겠지. 지난 11월 밤에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시로코의 모습은 여러가지를 시사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게 길을 벗어나면 기상천외한 일을 벌일수도 있겠구나 그런 것. 뭐 유우토 군 같은 과지, 묘하게 기준이 어긋나 있다고 할까. 아예 한바퀴 돌아서 완전히 어긋나 주지 않으려나, 같은 기대를 해보다가 말다가. 응, 히메 군? 히메 군은 논외야. 길이 없으니까 말야. 그건 단순한 직감이고 한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미지였다.
"응? 그나저나 큰일인데, 이제 옆에서 태클 거는 목소리도 안 들려."
그건 좀 아니지, 뭐 이런 거. 양심이라고 할까. 적어도 14년 이상 진지하게 입에 담은 적 없는 단어를 떠올리니 신기한 기분밖에 들지 않았지만.
"이젠 술도 안 마시는데 헛소리를 하는 녀석이 있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뭐어."
"너는 죽어도 회개는 안 할 타입인걸…."
거의 집단적 독백에 가까운 대화를 주고받고 시로코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래서야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아 이치지쿠는 세 번째의 질문은 속으로 삼켰다. 쓰러진 와중에도 술병은 손에 꽉 쥐고 놓지 않는 사케시 히로의 어떤 집념 같은 걸 구경하다 보면 크리스피 구구는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생각이 난다. 그거 진짜 먹을 줄 알았는데. 비둘기. 다시 생각해도 기막힌 작명솜씨다.
직관적이라고 하는 게 좋을까. 그건 부모님이랑 닮았지, 히로 군. 이치지쿠는 어떤 연구소를 떠올렸다. 그 사람들도 어지간히 직관적으로 짓고 다녔고. 이치지쿠(무화과)라서 스미르나smyrna 에 숫자를 붙인다던가 직관을 넘어서 생각을 안 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덕분에 기억에는 제대로 남아서 남은 자료를 회수하는 데엔 도움이 됐지만. 딱히 고맙다고 생각되지는 않네. 그렇겠지? 덕분에 주사가 엄청 싫단 말야. 좋은 기억인가 나쁜 기억인가 하면 후자였기에 아직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2
히로 군의 부모님과 비교하면 우리 집은 평범하다고 할까 순진하구나, 이치지쿠는 어깨를 으쓱이며 조금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를 지나친다. 사실 부모가 바뀐 걸지도 모르지, 태평한 생각. 그랬다면 뭐 각자 적당히 적응해 잘 살았을 것 같다. 딱히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술에 담궈진 것에 가까운 지금의 사케시 히로와 예전을 비교하면─같은 사람인 줄이야 이제나 알았지만─꽤나 모범생 같았으므로. 아니, 거기 있는 사람 대부분 일단은 모범생이었기도 하고. 솔직하게 외로움을 탈 인격이라면 그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이것저것은 충격이었겠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어서 망했는지는 몰라도 그거 충격도 될 거고. 역시 나중에 물어볼까? 이치지쿠는 문득 손톱 끄트머리에 걸리는 게 없나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더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1월은 해가 짧아 벌써 노을이 졌다. 그리하여 건물 벽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것은 평범하게 아름답다고 느낀다.
분명 감수성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이치지쿠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 하야시 군. 아직 이케부쿠로에 있었어?"
"오오우나바라씨.…앗!! 오늘은 제 발로 서 있어!"
얼굴보다 더 얼굴같았던 마스크와 고글을 벗은 하야시가 착실한 학생답게 '좋은 생각이에요! 걷는 건 중요하다구요.' 같은 말을 해왔다. 뭔가 얼굴이 핀 것 같네. 보통 죽상이라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이고 있던 하야시의 표정은 12월의 그날 이후 어느쯤부터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은 뭘 또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 하야시에게 스쳐가는 곤란함 같은 건 대부분이 그 또래 나이대에 맞는 사소한 일일 것이다. 곤란한 아버지가 어떻게든 사라진 덕분이지. 그러고 보면 하야시라는 이름은 소년이 나름대로 궁리해본 신분을 숨기는 방식 중 하나였는데, 이치지쿠는 본명을 알았어도 딱히 부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걸로 충분했고 본명과 다른 이름을 기를 세워 구분하기에는 인터넷 문화에 매우 잘 적응했으며 지금 불러봤자 재미도 즐겁지도 않을 테니까. 하야시보다 슌타로 군이 먼저 생각나거나 그렇게 부르는 게 더 싫게 느껴질 때를 위해서 적당히 아껴두기로 생각한 것이다.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곧 새 휠체어가 도착할 테니까 레어한 상황이라고?"
"오오…. 그럼 저 운이 좋은 건가요?"
"뭐 그런 걸로 쳐도 되고. 표정이 좋아졌네, 소년."
아버지 일은 잘 해결됐나 봐? 이전 인터뷰의 소감을 간단하게 전했을 때처럼 하야시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하고 곧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이미 며칠인가가 지난 거겠지. 기쁨이 쉽게 승리를 차지한 하야시가 변함없이 '쉽게 믿는 성격'으로 그 다음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누나는 어쩌기로 했는지, 같은 것을 늘어놓는 것을 듣는다. 사람은 아주 기쁜 일이 있으면 무심코 어딘가에 말하게 되는 버릇이 있지. 사람의 그릇은 무한하지 않으므로 격한 감정은 뭐든지 어떻게든 발산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뭐라고 하냐면, 그러니까….
"있지, 네 행복이 뭐지, 하야시 군?"
나오이 슌타로, 이케부쿠로의 하야시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아마도 지금일 것 같아요, 일상이 돌아와서, 그런 실로 모범적이고 건강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 그래. 이치지쿠는 쓴웃음을 지었다.
큰 문제는 사라졌고, 도와주는 어른들도 있고, 믿어 주는 친구도 있고, 소중한 가족이 있고, 이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정도 얻었다. 정말 지루해 죽을 만큼 평범하고 보편적이고 정확한 대답이로군. 이치지쿠는 문득 정말로 두 발로 서 있는게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소년이지만 왠지 결말이 보이는 거 같아. 아마 해피엔딩이겠지. 고향 친구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줬다는 말을 기쁘게 자랑하는 하야시에게 이치지쿠는 잘 됐네, 하고 웃는 얼굴로 대답다.
그거 참.
"왠지…. 멀쩡한 질문이네요."
똑같은 질문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나서야 실례였나 생각했는지 잠시 조용하던 하나부사 쥰은 그러나 이쯤 그 반응이 무례하다기보다는 객관적인 평가에 들어갈 수 있음을 어느정도 짐작했으므로 단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쯤 되면 '전에는 멀쩡하지 않은 질문만 했다는 거?' 하며 실례니 어쩌니 귀찮고 짜증날 법한 말이 뒤를 추격했을 것이나, 이치지쿠는 '형식미'로 산 아메리카노가 든 컵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기만 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글쎄, 갑자기 생각나서."
그리고 빨대를 잡고 바닥을 통통 치기 시작한다.
"별 건 아니야, 쥰 씨. 어떤 책 코멘트를 부탁받았거든."
"아, 행복이 주제인 소설이나 에세이인가요?"
"뭐 그렇다고 칠까."
'그렇다고 칠까' 라니. 미세하게 곤란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이치지쿠는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진짜 궁금한 건 재차 물어보게 되기 마련이고, 이치지쿠는 자기 일을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 거의 0%에 가까운 사람인데다가 하나부사 쥰은 워낙에 고지식해 꽤 많은 일에 일상적인 곤란함을 느끼고 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정리하는 루틴이 잡혀 있었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다시 돌아오는 질문은 없었고 이미 무언가 납득한 듯 쥰이 음, 신음했다.
"정말 작가님이시군요. 아니, 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평소에는 실감이 잘 안 나서요. 그리고 쥰은 이치지쿠의 발치를 한 번 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린다. 휠체어가 없는 게 그렇게 어색한가. 굳이 다리를 꼬아 앉은 채 이치지쿠가 컵을 내려놓았다. 뭐 오래 타고 다니긴 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슬슬 다리가 한계였다. 역시 조금은 걸어 두는 게 좋나 고민을 해 볼 정도로는. 따로 운동을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리 근육과 걷는 체력은 또 별개인 법이다.
이번 주말의 쥰은 웬일로 담배가 아니라 기타를 들고 있었고, 버스킹을 할까, 그럼 무슨 곡을 하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이었다. 이치지쿠가 보여 언제나처럼 '오셨군' 생각하다가 알아서 걸어오는 모습이 생소해 딩,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기타 줄이 튕겨져 만화에 나올 법한 효과음이 공원을 울릴 즈음 그 질문은 들어왔다. '쥰 씨의 행복은 뭐죠?' 비스무리한.
"어쩐지 대답하면 그걸 허사로 만들려고 하실 것 같지만."
"응~, 그럼, 퀴즈. 내가 그 대답을 몇 번 들었을까요?"
"…음, 몇 번 물어보고 다니셨습니까?"
"왤까아~? 뭔가 대답해주기 싫어졌어."
그게 충분한 답이 되었다. 물어보는 족족 비슷하게 반응했다는 말이니까.
"특별한 게 생각나지는 않습니다만…."
"하긴 쥰씨는 숙제가 먼저 있었지."
"아아, 몸 속의, 아주 작은 한 점에서부터, 말이죠. 기억하고 계셨군요."
"재미있는 퍼즐 같으니까 말야?"
그런 숙제가 있으면 일단 행복하기엔 조금 곤란하겠지요, 신경쓰이니까요, 쥰은 중얼거리며 기타를 몇 번 튕겨 음을 조절했다. 그러나 조금 뒤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평범했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만족 기준이 좀 낮네, 쥰 씨."
"그런가요? 보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질문자와 같이 하나부사 쥰 또한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기도 했다.
"뭐지, 이 난장판?"
아~, 어서 와. 이치지쿠는 대충 인사하며 만년필 끝으로 이마를 긁었다. 대충 쌓아둔 원고지 더미를 읽기 편하게 낱장으로 풀어 쌓아뒀는데, 기지개를 켜다가 툭 쳐서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대참사다. 현관에서는 적당히 피해서 바닥을 밟던 야츠모는 거실로 들어서자 피하기 위해서는 순간이동 같은 초능력이 필요할 거라는 걸 깨닫고 그냥 밟기 시작했다. 이 방에서의 약 두 달은 인쇄된 데다가 교정이 적히지도 않은 원고는 이면지와 크게 다를 바는 없다는 걸 알게 해 줄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이치지쿠가 버릇처럼 밟으면 어떡하냐 푸념하는 소리는 흘려듣고. 진짜 밟으면 안 되는 거면 정말 시끄럽게 굴기 시작하는 데다가 사실 안 치운 게 잘못이다.
"뭐 그건 그렇고."
이렇게. 밟지 마, 구겨지잖아, 밟지 말라니까, 피할 수 있잖아, 같은 말을 중얼거린 거 치고─애초에 전 혀 감정이 담기지도 않은 국어책 읽기였지만─화제를 금방 전환한 이치지쿠가 핸드폰을 열어 버튼을 몇 개 눌러보더니 야츠모를 보고 다시 물었다.
"오늘은 뭐 시킬 거야?"
야츠모는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잠시 침묵했다.
이자식이 남 좋을 일을 순순히 해줄 리가 없는데.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치지쿠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1월 1일부터 정말로 50만엔을 채울 기세로 외식이나 배달 같은 걸로 저녁을 해결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치지쿠는 스스로 뭘 만들어 먹을 생각을 거의 안했지만, 그건 그거고, 쭉 야츠모 몫까지 착실하게 시키는 데다가 메뉴 선정을 물어본다는 점이 특히 이상한 부분이었다. 매우 사소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이치지쿠가 대상이라면 '죽을 때 됐나' 싶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귀찮을 때 외에는 말해줘도 '근데 이거 먹고 싶어' 하던 녀석이 그대로 음식을 시키는 일이 며칠이나 반복되면 아무래도 이상하다.
"사고 쳤냐?"
"호의에 돌아오는 대답이 대체 왜 이러지?"
몰라서 묻나? 야츠모가 이치지쿠를 빤히 바라봤다. 이치지쿠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서른이 할 짓은 아니었으므로 야츠모는 고개를 한 번 절레절레 젓고, 역시 이상하네 생각했다. 어느 날은 장난 삼아 호텔 뷔페 배달을 하자 그랬더니 그래, 하고 선뜻 사는 것 아닌가.
"네 경제관념도 이상하긴 이상해."
"갑자기 뭐야?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은걸, 대체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수가 없어. 벌이는 괜찮은 편일 텐데 말이야. 가계부 같은 거라도 쓰는 연습을 하는 게 어떨까?"
"난 분명 새해 첫 날에 원한 좀 덜 사면서 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왜 입은 전혀 변하질 않을까."
"저기, 그래서 밥 사주잖아."
"그러니까 입을 좀 가만 두라고, 입을. 아니, 행동도."
"어차피 내가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기뻐'같은 말 해봤자 어디 아픈가 싶을 거 아냐? 뭐 꿍꿍이 속이 따로 있냐던가. 그러느니 평소대로 구는 게 낫지. 그래서 뭐 먹을 건데?"
하여간 한마디 질 생각을 안 하지. 이걸 쥐어박아 말아. 주먹을 쥘락말락하는 손을 내려다보는 야츠모를 보고 이치지쿠가 짐작한 속내가 이렇다. 그리고 그렇게 짐작해 놓고도 이치지쿠는 다시 입을 놀렸다.
"애초에 나쁠 거 없잖아? 내가 거기 독을 타겠어, 약을 타겠어. 말하고 나니 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럴 이유도 없고,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뀔 리도 없고, 그럼 사준다는 건 누리는 게 이득이지. 조금 기다리면 마시멜로를 하나 더 준다는데 굳이 당장 먹을 필요 없지? 간단한 계산이지?"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말이다. '계산 어려워? 1더하기 1이 뭐야 야츠모군?' 같은 말이 흘러나올 때 결국 정수리에 주먹이 한 번 내리쳐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악! 짧은 비명이 들려오고 이치지쿠는 정수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침대에 엎어졌다.
"잠깐, 요즘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
"오호라, 머리를 때려도 뇌세포가 닳는 건 아닌가 본데. 정확하게 판단했네."
"저기, 네가 차라리 네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같은 말을 했어도 이렇게 조금씩 머리에 충격이 쌓이면서 천천히 죽이는 건 좀 악취미라고 봐."
그리고 야츠모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고민이라도 하듯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이치지쿠는 그대로 뒹굴 굴러 침대 끝으로 가 방치했던 노트와 만년필을 쥐었다. 저 일 하고 있어요, 착실하거든요, 그런 어필이라도 하듯이.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 며칠 전 마루베가 보내준 신인 대상 작품 중에는 매우 감성적인 것도 두어권 섞여 있어 혼자일 때만 읽으려 부득불 애쓰다 보니 다 본 것은 겨우 그제였다. 그리고 감상이라고 할까 코멘트나 피드백을 다 쓴 것이 어제. 단지 내용이 새삼스럽게 매우 상냥한 어조로 쓰여 있어 이치지쿠는 새삼스레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각 잡고 덧붙이고 없앨 기분도 또 들지 않아서 이렇게 침대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다가 적당히 몇 자 끼적이고 한참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근데 진짜 빨리 골라, 일본은 24시 여는 가게가 거의 없다고. 곧 문 닫는다니까?"
"너 딱 5분 조용했던 거 알아?"
"그걸 세고 있었어? 쪼잔하긴."
한 번 더 정의의 응징이 있고 난 뒤 이치지쿠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검토나 하고 있으려니 글자 위로 직 그어진 선 하나가 괜시리 더 우울했다. 거 참. 노트를 팔락팔락 넘겨보고 속독한 다음 이치지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스스로 적은 상냥한 문장에 눈이 아파 안경을 벗고 눈을 가볍게 문지른다. 무엇보다, 딱히 의식해서 적은 게 아니기에 곤란했다.
사람이 상냥해지는 것은 가까운 사람,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보통은 전자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만큼 아끼고 보살피는 게 당연하지. 후자는 조금 특이하다. 어떻게 보면 사랑을 너무 받은 타입이라고 할까, 안정감이나 신뢰가 너무 커서 도리어 살펴보질 못한다고 할까. 관계에 확신이 있어 확신 없는 타인에게 미움받기 싫어 더 상냥해지는 부류들.
이치지쿠는 보다시피, 얼굴은 커녕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활자 너머의 사람에게는 상냥해질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정적인 관계가 있느냐면 언어도단. 이치지쿠는 관계가 영원할 리 없다고 자신했다. 이혼률이 얼마나 높은 줄 알아? 친족 간에 재판이 벌어지는 일은 또 얼마나 많고. 그러므로 둘 중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없다. 이치지쿠는 그냥.
"그런데 어제 다 썼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첨삭 하는 중이야."
"네가 진짜 글 쓰고 있으니까 뭔가 이상한데. 하고 다니는 건 무슨 매드 사이언티스트나 닥터 같은데 말이야."
"그런 너는 왜 총을 안 들고 다녀? 완전 딱인데."
"총 가지고 다니면 불법이거든."
"네 직업은 합법인가 물어보고 싶지만… …. 넘어가자고. 가지고는 있고?"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데?"
일찍이 이치지쿠는 어떤 선택을 했다. 아끼려고 한다면 아낄 수는 있다. 그도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법은 알았고, 아이의 섬세한 취급은 되려 익숙했다. 칭찬 정도는 사감 없이 해줄 수 있고, 은 어렵지만 누가 봐도 걱정하고 있구나 생각할 법하게 행동할 수는 있었다. 누굴 끌어안거나 뽀뽀를 해 주는 일 정도는 뭐, 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길을 선택했다. 꽤 삐뚤어진 방식이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하게 사랑하는 방식을 익히기에는 조금 부아가 치밀었으니까.
"없으면 줄까 했지."
"총을? … 너 원한을 덜 살 마음이 있기는 하?"
"그야 뭐 죽고 싶진 않으니까 어느 정도는 아마도…."
원하면 정상적인 사람처럼 굴 수 있고 예전보다는 그런 감각도 짐작할 수 있게 된 이치지쿠지만, 그러므로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만든 애정이 그러니까, 멀쩡하기는 어려웠다. 이치지쿠는 이제 딱히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사람 열받는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버릇이 되어버린 성격이었다. 좋아하니까 잘해줘? 사랑하니까 아껴줘? 뭐야 그게. 무슨 감각이더라.
딱히 좋아하는 걸 망가뜨리고 싶다거나 상처주고 싶은 취향은 없지만, 한번쯤 할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꽃이 자라는 모습도 피는 모습도 지는 모습도 다 모아서 꽃이니까. 이치지쿠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그렇게 사고를 한번 틀었다.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진실을 아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치지쿠도 자신이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진실을 들춰볼 생각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린 날 생각한 것처럼, 뭔가를 순수하게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은, 그럴 수는 없을 거라는 것과 같은 진실 말이다.
네 말이 맞아. 새해 첫 날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래, 난 치사해. 그리고 그게 꽤 맘에 들어. 너희는 원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돈 상관없잖아. 그 또한 나이에 맞지 않는 유치한 생떼임을 알면서 픽 웃어 무시한 몇 초 뒤 이 생각을 말 그대로 땅에 묻어버린 다음, 이치지쿠는 오늘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질문을 내뱉었다. 보편적 기준에 의거한, 바로 그 행복을 눈앞에서 놓쳤던 남자에게.
"야츠모 군, 네 행복은 뭐야?"
얼굴을 알 수 없는 대신 가슴 속을 갈라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오래 하기엔 이치지쿠는 스스로 때로 싫다고 느낄 정도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므로 망상 같은 생각을 치운 채 대답을 기다렸다. 아마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겠지 예상하면서.
그냥 쓰다 생각나서 탐라에 던진 건데 답변 들으니 좋더군요
풀어주시면 기쁩니다
진짜_정말_최종_엔딩로그
여러저러 이유로 이치지쿠를 꺾? 꺾...꺾어봤습니다 시간이 주는 자연스러운 변화에 가깝겠지만요
이하 늘하는인사
계속 놀아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제가 복닥복닥 같은 세계에 있어~같은 걸 좋아해서 자꾸 천삼지 친구들을 데리고 오네요
각자 그렇게 사는구나가 좋아서요 늘신세를집니다
정말 별 시비 다 걸고 나서야 약간의 정서교류가 가능하고...
그중에 고 비율이 구라고...
인생에 걸림돌 만들거나 생기는 거만 좋아하고...
쓸수록 희한하네 얘랑진짜놀아주셔서감사합니다
요즘 감기가 유행한다지요...
2010년 장르에 몸을 담근 김에 유행과는 멀어져보시길바라며
추운날씨조심하시옵소서 읽어주셔서감사
그는 신기하게 생긴 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걸 머스킷이라고 부른다는 걸 눈치채기에는 꽤 오래 전부터 그의 머리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고, 멀쩡할 때에도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냥 '낡은 총' 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총은 그가 멋대로 빌려 쓰는 폐 건물의 구석에 정중하게 놓여 있었는데 나름의 이성을 긁어모아 이틀을 지켜보았음에도 아무도 찾으러 온 사람이 없었기에 그 총은 자연스레 그의 것이 되었다. 어쩐지 그 이후로 패는 더 이상하게 들어오는 것 같고, 빚을 진 사람들에게 들키는 일도 늘었으나 총, 총이라는 것 때문에 그는 원인을 하늘로 돌렸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한 번은 살 테니까. 그러니까 전부 저 위에 있는 놈이 나쁘다, 하고 도박신이고 재물신이고 닥치는 대로 험담을 하다가 어느 날은 오늘은 제발 좋은 패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빌었다. 그래도 여유가 생겨서 그는 가끔 나쁜 패가 들어와도 히죽히죽 웃었다. 정 못 참겠다 싶으면 협박을 해서 싹 가지고 튀어도 좋지, 한 탕 하는 거야. 너흰 이런 게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겠지! 아무렴 야쿠자라고 해도 총을 편하게 쓸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날은 묘한 우월감이 채워지기도 했다.
나는 굉장한 걸 가지고 있어, 마법처럼 뭐든 해결할 수 있는 걸 말이야.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방아쇠를 당기는 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거리에서 어느 날 총성이 울렸으며, 어느 클럽의 도박장에서 벌어진 일로 뉴스는 연일 같은 이야기를 해 댔다.
그 즈음 뉴스가 흘러나오는 커다란 빌딩 전광판 아래의 서점에서는, 어떤 작가의 신작 소설 발매 기념으로 이벤트를 열고 있었다.
'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월 마지막의 오필리어 (0) | 2024.01.22 |
---|---|
코코포리아 pl 하는법 초간단 (0) | 2024.01.14 |
CM 모음 (0) | 2024.01.11 |
Log 2 (0) | 2024.01.11 |
2월 신간 「카카오 함량 99.9% 초콜릿과 발렌타인」 (0) | 2023.12.22 |